어느덧 놀이터에 다다랐다. 모든 놀이 기구들은 길다란 공가 스티커로 칭칭 감겨져 있다. '침범 시 500백만원의 벌금이 부과 됩니다.' 가 연달아 쓰여 있다.
놀이터 한켠에 정자 지붕을 다 덮고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공간과 터전에 속해 있던 모든 사물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무 만은 사라지지 않을것을 주민들에게 약속하는 징표 였으면 한다. 이전에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여기 나무들은 다 신령이 깃들어 있어 우리에게 매 순간 말을 걸고 있다고. 이곳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나무와 공존하는 곳이다. 나무가 숨이 트일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를 떠나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이 동네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하셨다. 이 동네는 고층 건물 투성이인 서울의 여느 동네들 과 달리 숲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고 하셨다. 지금껏 이곳 주민들은 매일같이 나무들과 소통하며 지내왔다. 거대한 고목들이 외부의 소리를 차단시키고 휴식처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음이 진정되고 주민들의 숨소리 에서는 나무냄새가 난다. 나무의 기운이 살아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kay는 할아버지의 버드나무를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kay는 발견했다. 어릴적 아파트 3층 정도의 높이였던 나무들이 한 시선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장엄 해졌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나무들이 아파트들 보다 키가 크다. 이전에는 나무가 건물을 집어삼킨다는 듯 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무들이 아파트보고 가지 말라고 감싸주고 지켜주는 느낌이 더 크다. 마치 보호막 처럼. 해가 지니 나무의 그림자들이 더 층층이 쌓이면서 커다랗고 따듯한 온실이 되는 듯 했다.
Kay는 이곳의 ‘나무’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매개채 인듯 하다고 생각했다. 주민들도 지금껏 재건축 과정이 미뤄졌던 큰 이유가 고목들 때문이었다고들 이야기한다. 처음 재건축이 거론 되었을 때도 너도 나도 ‘우리 어디가지’ 보다 나무 걱정이 컸다. 현재 그 나무들은 번호가 매겨지고 있다.
번호가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 입양을 가는 것일까? 팔려가는 것일까? 입양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걸까?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올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다시 돌아온다는것을 암시하는 숫자들 이길 어렴풋이 빌어본다.
할아버지 댁이 곧 이사를 한다. 이번주에 짐과 쓰레기들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아릿한 마음이 깃든 편지들이 갈기 갈기 찢겨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집은 할아버지에게는 40년, kay에게는 20년 이라는 시간이 깃들여져 있다. 그녀는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이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kay는 할아버지의 서랍장에서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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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낮, 아들이 태어났다. 가족의 큰 경사를 달래고 어스름한 새벽 즈음 혼자서 산책을 나왔다. 이십분 정도 걷다 보니 놀이터가 지어지고 있는 공사현장까지 왔다. 그 옆에 작은 버드나무 묘목이 하나 있었다. 아들이 다 클 때 쯤이면 저 버드나무는 우리 집보다 커져 있을까. 문득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나중에 아들과 같이 버드나무를 찾으러 와야겠다. 』
kay는 전에 살던 집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집은 여전히 허름했고 오래된 흔적들이 예전보다 눈에 곳곳이 띄었다. 하지만 그곳은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누런 자국들은 결정들처럼 계속해서 뻗어나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집의 옥상 테라스 풍경은 빌딩숲과 네온사인에 둘러싸인 외딴 섬이었다. 거기에는 샤워실과 수도가 하나 있었는데, 녹물이 나왔다. 아주 진하고 탁한 노란색의. kay는 매일 그 물로 샤워하고 그 물을 마셨다. 며칠동안 그게 녹물인지도 모르고 먹고 씻고 하다 보니 목에서 피가 나왔다. 피가 나와서 기침을 계속했다. 황사바람이 몰아치는 사막의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처럼. 아빠에게 녹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자 아빠는 ( 왜 그동안 말을 안 했냐는 듯이 ) 방을 실내로 내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 깨끗한 물이 나왔고,
kay는 그 집을 나와 유년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찾아갔다.